Focus
“현실을 딛고 변신적 변화(Metamorphosis) 이뤄내자”
2025-09-10 교류/실천

‘전환 시대의 기관 행정’ 주제로 2025년 8월 고황연찬회(대학)
조인원 이사장, 미래지향의 Global Eminence 구현할 대학 행정의 길 제시
“변혁과 창조의 경희 전통 위에, 전환 시대 헤쳐갈 새 물결 함께 만들자”
학교법인 경희학원은 지난 8월 27일(수) 서울캠퍼스 청운관에서 ‘전환 시대의 기관 행정’을 주제로 고황연찬회(대학)를 열었다. 이번 연찬회는 급변하는 문명 전환기에 주어진 대학 혁신 방향을 모색했다. 교육·연구·실천의 탁월성과 지구적 존엄(Global Eminence) 구현을 위한 기관 경영 및 행정 기조를 고민하는 자리였다. 조인원 경희학원 이사장을 비롯해 법인 관계자, 대학 주요 보직자 및 행정 중간관리자가 참석했다.
경희학원은 경희의 설립정신과 역사·전통을 바탕으로 탁월한 현장 경영 리더십과 전문성 강화를 위해 고황연찬회를 개최하고 있다. 이번 연찬회는 경희의 가치와 철학에 관한 발표, 대학 기관 경영에 관한 발표, 인공지능 전환(AI/AX)의 전략적 방향 특강, 신임 교무위원 임명장 수여식, 이사장 인사말 순서로 진행됐다.
공동체에 대한 책임을 전제로 한 자유로운 사상과 실천 지향해 온 경희
조인원 이사장은 인사말을 통해 “경희의 전통과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 학문과 평화의 지구적 존엄”을 주제로 이야기를 나눴다. 그는 “우리가 지금 겪고 있는 이 시대는 대단히 빠르게 변하고 있다. 여러 위기와 기회가 중층적으로 교차하는 지금 시점에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메타모포시스’가 아닌가 한다. 이것은 경희가 오랜 기간 추구한 화두이기도 하다”라고 말했다. 메타모포시스는 애벌레가 나비가 되는 것과 같은 탈바꿈을 뜻하며, 사회나 기관의 변신적 변화를 상징하는 말이다.
한국전쟁 중에 태동한 경희는 시대와 역사를 성찰하면서 이념과 체제의 경계를 넘어 자유롭고 평화로운 세계의 길을 모색했다. 경희학원 설립자 미원(美源) 조영식 박사가 1951년 5월 18일 탈고해 6월 30일 피란지 대구에서 펴낸 저서 『문화세계의 창조』에 그 방향성이 담겨 있다. 이는 경희 정신의 토대가 됐다. 그해 8월 피란처 부산 동광동 캠퍼스 시대를 열면서 발표한 교훈 ‘학원의 민주화, 사상의 민주화, 생활의 민주화’와 1954년 서울 환도를 앞두고 1953년 말 착공한 본관 석조전 중앙 현관 입구에 새긴 ‘학문과 양심의 자유’ 역시 경희가 추구하는 지향을 잘 나타낸다.
조 이사장은 “경희는 이념적 대립에서 시작된 전쟁 중에, 그리고 휴전 직후에 ‘사상의 민주화’,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말했다. 당시 경직된 시대 상황을 고려하면 위험한 표현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길을 천명한 것은 자유롭게 학문하고 사유하는 일, 사상과 학문, 양심의 자기 조직적 이치를 이해하고, 성찰적 자유와 실천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는 점을 시대와 공유한 것이다. 인간의 인간다움을 추구하는 참된 학술기관의 길을 얼마나 갈구했는지 엿볼 수 있다. 경희가 제시한 ‘문화세계의 창조’는 인간의 인간적 사유와 사상의 길, 가치와 양심의 자기 조직적 속성을 중심에 둔 문명사적 전환의 기획이었다. 주어진 현실 너머 존재하는 변신적 변화를 기하려는 도전적 시도였고, 이념 대결을 초월한 ‘제3의 길’이었다. 지난 세기말부터 논의되기 시작한 ‘제3의 길’보다 앞서, 경희는 인간과 공동체의 자기 조직적 포용의 가치와 양심, 이에 따른 공적 책임 의식을 근간으로 문명사의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며 경희 정신의 연원과 가치에 대한 이해(理解)를 전했다.
이어 조 이사장은 “그런 이해에 근거한다면, 이 정신은 지금도 이어진다. 경희는 공동체적 책임을 전제로 한 자유로운 사상과 철학, 공적 실천을 지향하며 ‘학문과 평화’의 전통을 이어간다. 인류 역사상 유례없는 전환기를 맞은 지금, 경희의 전통은 오늘의 시대가 요청하는 가치와도 연결돼 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도래할 미래의 요청과 미래세대의 필요에 맞게 그 정신을 어떻게 키워낼 것인가의 문제”라며, “경희학원의 유아교육, 초·중등교육, 고등교육 기관까지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성찰하는 일이 필요하다. 그것이 아주 큰 전환의 시대를 맞아 시대의 새로운 물결을 함께 만들어가야 할 공동의 과제가 아닐까 한다”라고 전했다.
전례 없는 위기이자 천재일우의 기회
조 이사장은 그동안 여러 자리에서 이 시대가 겪고 있는 난제들이 진퇴양난(進退兩難)이라고 말해왔다. 과학기술의 급진적 발전과 산업문명 확산은 유례없는 삶의 편익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 이면엔 지구상 거의 모든 존재의 운명을 가를 실존적 위기가 깊어지고 있다. 최근 우리가 직접 체감하는 현실의 변화는 ‘진화 혹은 절멸’, ‘평화 혹은 붕괴’라는 대단히 무겁고 버거운 선택지를 우리에게 남겨줬다.
유엔 산하 세계기상기구(WMO)는 2024년이 산업화 이전(1850~1900년) 대비 지구 평균 기온이 1.5도를 초과한 첫해였다고 발표했다. 2024년 지구 평균 기온은 1.55도 상승해, 이 해를 포함한 최근 10년이 인류 역사상 가장 뜨거운 시기로 기록됐다. 지난해 지구 평균 온도가 기후 임계점을 넘어선 데 이어, 올여름 역대급 폭염 소식이 전 세계 곳곳에서 들려왔다. 수많은 사망자 발생, 가축 집단 폐사, 농작물 생산량 감소 등의 소식이 잇따랐다. 나날이 악화하는 기후 위기로 생명의 기반이 흔들리고, 국제정세의 대혼란으로 시대의 난맥상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
조 이사장은 “인간의 실존이 위협받는 세계의 현실이 교육·학술·연구기관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인공지능(AI), 퀀텀 컴퓨터와 같은 과학기술의 눈부신 발전이 시대의 난맥상을 풀어낼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제기하면서 말을 이어갔다. “AI와 머지않은 미래에 도래할지 모를 ASI(Artificial Super-Intelligence), 퀀텀 컴퓨터 시대는 식량과 물 부족, 기아와 빈곤, 기후·환경·생태 문제, 난치병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하고, 나아가 우주 기원과 인류 진화, 미래 예측과 같은 난해한 문제를 해결해 가는 데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남용 문제를 극복한다면, 전례 없던 긍정적인 결과가 기대된다”고 말했다.
미래학자이자 이론물리학자인 미치오 카쿠(Michio Kaku) 박사는 2023년 저서 『양자 컴퓨터의 미래(Quantum Supremacy)』 발표 이후, 여러 강연을 통해 “양자 컴퓨터는 우리의 모든 것을 바꿔놓을 것이다. 에너지, 의학, 농업 등 전 분야에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양자 컴퓨터가 핵융합 에너지 상용화를 이끌어 에너지 문제를 해결하고, 분자 단위의 질병 모델링을 가능케 해 암·치매 등 난치병 극복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했다. 또한 이산화탄소의 고부가가치 물질 전환과 인공 광합성 기술 개발에 돌파구를 제시해, 기후와 식량 문제 해결에도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조 이사장은 “AI와 퀀텀 컴퓨터의 미래는 아직 미지(未知, Unknown Unknowns)의 영역이다.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 미래를 온전히 알지 못한 상황에서 그 후 시대를 가늠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미래의 혼란을 가중하는 또 다른 현실의 가능성을 소개했다. 시공간 조작 기술 개발 가능성 발언과 미확인 이상 현상 UAP(Unidentified Anomalous Phenomenon)에 관한 사건이다. 2025년 4월, 미국 백악관 과학기술정책실장인 마이클 크래시오스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행한 연설에서 “Our technologies permit us to manipulate time and space. They leave distance annihilated···”라고 말했다. 기술의 파급력과 변혁 가능성을 시사했다. ‘우리 기술은 시간과 공간 조작을 가능하게 하며, 거리를 없애기도 한다’는 은유적 표현이다. 또 다른 맥락이지만, 지난 2023년과 2024년 미국 의회에서 열린 UAP 청문회에서는 전직 펜타곤 내 UAP 조사 책임자와 공군 정보기관 인사, 퇴역 해군 장성 등이 ‘우리는 우주에 홀로 있는 것이 아니다’라는 증언과 함께, ‘외계 지적 존재(NHI, Non-Human Intelligence)의 것으로 추정되는 추락한 우주선 회수가 있었다.’ ’그 안에는 인간 아닌 생물체(Non-Human Biologics)도 있었다’ ‘UAP는 지상뿐 아니라 해저에서도 목격된다’는 요지의 보고를 받았다는 증언이 있었다.
조 이사장은 “지난 몇 년 이야기를 나눠온 시대의 난제 기후, 핵, UAP를 종합적으로 살피면 지금은 전례 없는 위기다. 그러나 깊어지는 위기는 또 다른 사유와 실천의 지평을 연다는 측면에서 새로운 기회일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최근 새롭게 떠오른 AI와 퀀텀 컴퓨터는 잘만 사용하면 새로운 기회, 천재일우의 기회(Golden Opportunity)일 수 있다. 시대의 난맥상에 얽혀 있는 복잡한 이해관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역사의 단초를 제공할 수 있을지 모른다. 미래는 결국 우리 손에 달려 있다. 인간의 선택이다. 어떤 현실 인식을 가질 것인가. 어떤 의식과 가치를 지향하면서 문명의 미래를 열 것인가. 미래는 그런 고민과 선택, 공적 실천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다. 학술과 교육, 실천 기관인 경희가 이 점을 깊이 인식하면서 더 나은 미래를 향한 행보를 이어갔으면 한다. 자리를 함께한 여러분이 소속된 부서, 단과대학(원), 캠퍼스를 초월해 시대가 요청하는 당위적 과제를 풀어가야 할 책임과 소명 의식을 가져주길 바란다. 지혜를 모아 미래를 앞서 준비해 달라”고 당부했다.

더 나은 인류의 미래를 향한 공적 책무, Global Eminence 구현
지은림 학무부총장(서울)의 사회로 조 이사장과의 질의응답이 이어졌다. 지 부총장은 “이사장님 말씀처럼 지금은 위기지만, 새로운 차원으로 도약할 기회가 될 수 있는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경희의 오랜 꿈인 ‘세계적인 명문 대학’으로 도약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 하는 골든 타임이다. 그래서 우리의 전략과 방향성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면서 대학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에 관한 조언을 요청했다.
조 이사장은 “우리 모두의 꿈은 설립자의 1954년 학장 취임식 연설에 잘 드러나 있다. 그때는 휴전 직후로, 온 국토가 폐허였다. 우리나라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2024년 3만 6,000여 달러의 약 520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70달러가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경희는 절망의 시대에도 ‘동서양 어디에도 없는 세계 제일의 대학’을 꿈꿨다. 미래를 향한 원대한 비전을 세웠고, 그 정신을 바탕으로 한 길을 걸어왔다. ‘학문과 평화’의 지구적 실천을 실현하는 고유한 지성의 전통을 세워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그는 세계 명문으로 가는 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나눴다. “세계 명문의 길에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구성원의 긍지’다. 긍지를 만들어내는 요인은 크게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교육과 연구의 탁월성(Excellence)이다. 학계와 사회가 인정하고 필요로 하는 교육과 연구를 수행하는 대학. 그런 대학은 이미 우리나라에도 있고, 세계적으로도 많다. 우리도 물론 그중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류 사회가 희망하고 갈망하는 미래를 여는 일이다. 그 길은 교육과 연구일 수도, 혹은 공적 실천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중요한 일은 대학이 우리 모두의 보편 가치인 인류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창의적 노력과 성취를 이뤄내는가의 문제다”라고 방향을 제시했다.
덧붙여 “최근 영국의 한 글로벌 대학평가기관은 2019년부터 이런 기여도를 대학평가에 처음 반영하기 시작했다. 매우 늦은 감이 없진 않지만, 바람직한 일이다. 경희는 세계 상위, 국내 최정상에 올랐다. 올해도 그 전통은 이어졌다. 국제사회 위상은 더 올랐다. 경희인 모두와 행정에 참여하는 여러분이 함께 이뤄낸 성취다. 이 사례는 경희의 전통과 지속 가능한 인류의 미래, 더 나은 세계를 위해 우리가 어떤 역할과 책임을 앞으로 더 해야 하는지 다시금 말해 준다. 대학이 추구해야 할 교육, 연구, 실천의 탁월성은 단순한 경쟁력이나 배타적 쟁취와는 사뭇 다르다. 그것은 우리 모두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경희가 오랜 세월 ‘학문과 평화의 지구적 존엄, Towards Global Eminence’를 지향해 온 것도 이 때문이다. 그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노력할 때, 진정한 의미의 명문의 길이 열릴 것이다”라는 생각을 전했다.
현실 직시하면서 시대와 미래 나아갈 길 제시하는 기관 행정
지 부총장은 “교육과 연구, 실천의 탁월성을 통해 지구적 존엄을 구현하는 방향으로 혁신해야 한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됐다”는 소회와 함께 질문을 이어갔다. “혁신의 한 방법으로 거버넌스 개편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사장님께서는 총장 재임 시절인 2009년, 단과대학(원)의 자율 운영을 도입하셨다. 당시 ‘42명의 총장이 경희를 이끌어갑니다’라는 문구가 언론에 보도된 후, 외부에서 많은 문의를 받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혁신적인 거버넌스 개편이었다. 2018년에도 미래대학 거버넌스를 준비하셨다. 행정과 거버넌스 혁신 측면에서 이사장님께서 오랜 대학 경영 경험을 통해 터득하신 지혜와 통찰을 듣고 싶다”고 질문했다.
조 이사장은 “앞서 언급한 ‘자유’가 ‘책임’을 전제하듯이, ‘자율’ 또한 책임과 분리될 수 없다. 그동안 여러 자리에서 전해온 바와 같이, 기관에서 직책을 맡는다는 것은 곧 그 기관의 소임(Mission)과 핵심 가치(Core Values)를 성실히 수행하겠다는 책임을 짊어지는 일이다. 경희의 역사와 전통을 이어가야 할 책임, 현실을 성공적으로 관리해야 할 책임, 미래를 선도해야 할 책임, 차기 기관 행정 리더십에 더욱 훌륭한 결과를 남겨줘야 할 책임이 보직자에게 주어진다. 이는 학문과 양심의 자유를 보장받는 동시에, 그 자유를 더 큰 공동체의 미래로 연결해야 하는 책무이기도 하다. 과거의 성취를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것을 넘어서는 성취를 만들어내는 일. 그것이 보직자와 행정인의 소임이자 보람일 것이다”라는 생각을 밝히며, 미래에 대한 책임 의식을 강조했다.
그는 “다가올 미래에 대응한다는 것은 분명 현실적으로 중요한 과제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문화세계의 창조’라는 교시와 함께, 설득력 있는 미래 구상을 만들어야 한다. 경희가 추구해 온 ‘동서양 어디에도 없는 명문’의 길은 경희의 미래이자, 국내외 대학 사회의 미래일 수 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가꿔 가느냐가 중요하다. 그런 대학이 사회와 국제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클 것이다. 이는 과거 지성인 집단을 대표하던 대학 본연의 역할과 책무를 되찾는 일이기도 하다. 산업화 물결 속에서 성장과 발전, 실리와 실용을 추구하는 경향이 짙어지면서 대학의 역할이 크게 위축됐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응시하면서 대응하되, 그것에 파묻혀서는 안 될 것이다. 이를 넘어서야 한다. 시대가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기관 행정이 필요한 시점이다. 대학인인 우리 스스로가 물어야 한다. ‘대학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고, 인간과 세계의 미래를 위해 어떤 활로를 열어갈 것인가?’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이 일상 업무를 수행해 갈 때 늘 자문하고 스스로 답을 찾아내는 노력을 기울이는 일이 대단히 중요하다고 본다”라고 말했다.
행정과 거버넌스에 관한 질문에 “경희의 역사와 전통 위에서 어떤 관점을 갖고 현실과 미래를 조망할 것인가에 따라 많은 것이 달라진다고 생각한다”면서 전일적 관점에서 행정을 바라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그는 다음과 같은 조언과 당부를 전했다.
“총장 재임 시절인 2018년, 미래대학 거버넌스를 준비해 보고해 달라는 이사회의 주문이 있었다. 그때 미래대학 거버넌스를 준비했다. 최근에도 해외 대학 거버넌스를 다시 한번 살펴볼 기회가 있었다. 하버드대 역대 총장 평균 재임 기간은 20년이다. 주요 사립대 보직자 평균 재임 기간은 10년 정도다. 이들 대학은 기관장이나 주요 보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탁월한 연륜과 전문성을 갖춘 후보자 물색과 철저한 검증 과정을 거친다. 그 과정에 짧게는 6개월에서 1년, 길게는 2년 이상 공을 들인다. 한국 대학의 경우, 보직자 재임 기간은 매우 짧은 편이다. 빠르게 순환되면서 전문성이 쌓일 틈이 없다. 외부에서 오랜 기간 훌륭한 성취를 거둔 인사를 후보자군에 올려놓고 심도 있는 검증을 거듭하는 문화도 아직은 별로 없다. 대학 발전을 위해 보직자의 전문성과 미래지향의 실천 역량을 쌓아가고 점검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급변하는 전환 문명 시대에 필요한 일 중 하나가 대학뿐 아니라 시대와 문명사의 흐름을 이해하고 변화를 선도하는 창의적 전문성이다. 대학의 미래를 구성하는 중심축 중 하나가 안정성, 역동성, 미래 지향성을 견인해 내는 행정 역량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데이터 분석과 해석, 미래 예찰, 기관 행정의 통합적·전일적 이해를 바탕으로 함께 고민하고 지혜를 모아, 탁월한 대학 행정 문화를 함께 만들어 가는 일이 필요하다.”
나형민 미술대학장은 “이제 새롭게 2학기를 시작하게 된다. 대학 구성원의 메타모포시스, 변혁과 창조를 위해 대학 행정가인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과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 궁금하다”고 질문했다.
이에 조 이사장은 “구성원이 큰 긍지와 포부를 느끼고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일”을 특히 강조했다. 그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대학 현장 일선에서 경희인의 긍지와 포부의 조건을 제공하는 대학 행정을 강화해야 할 중책을 맡고 계신다. 경희의 전통은 항상 메타모포시스, 문명사적 변혁과 창조의 사명을 품어 왔다. 메타모포시스라는 말은 ‘넘어섬’을 뜻하는 메타(meta)와 ‘형태, 모습’을 뜻하는 모포시스(morphosis)가 결합한 말이다. 외형상 변화만이 아니다. 원형(原型)과 모체(母體)를 기반으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여는 전환을 의미한다. 생성적 현실과 미래, 온전함을 향한 변화와 창조의 도전 의지를 뜻한다. 경희의 역사와 전통은 그런 꿈을 키워왔다. 전쟁 직후 폐허 속에서 인간의 인간적인 ‘문화세계의 창조’를 지향했던 설립 정신, 동서양 어디에도 없는 새로운 대학을 향한 도전 의식은 현실 너머 존재하는 새로운 삶과 문명의 질서, 학문과 실천의 미래를 선도적으로 구성해 보자는 의지 표명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 우리가 지향하는 메타모포시스 또한 그런 정신에 기반한다. 시대의 흐름에 수동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다. 대학다운 대학의 미래, 새로운 문명의 미래를 창조하는 전환적 행정 역량을 함께 키워가자는 말이다. 두 가지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 구성원, 특히 미래세대가 소망하는 미래를 위해 기성 관행을 넘어서고, 경희인의 바람과 소망이 더 큰 결실을 볼 수 있도록 행정 내용과 면모를 새롭게 하는 일이다. 대학 행정에 참여하는 모든 분의 그런 마음 자세와 노력이 구성원 복지와 생활 만족도는 물론, 경희인의 긍지와 포부의 조건을 마련하는 밑거름이 될 것으로 생각한다. 이 점을 염두에 두면서 기관 경영의 중심축인 ‘가치’ ‘위상’ ‘인사’ ‘재정’ ‘글로벌·공공 협력’ ‘시설·인프라’ 면에서 최선을 다했으면 한다”라는 마음을 전했다.

“아포리아를 넘어서는 의식의 메타모포시스가 필요하다”
첫 번째 주제 발표는 ‘경희 전통과 Metamorphosis(변신적 변이)’였다. 발표를 맡은 신진숙 미래문명원 부원장은 “우리가 직면한 현실은 기존의 해법이나 익숙한 사고로는 풀리지 않는 난제의 총체다. 단순한 적응으로는 이 위기를 넘어설 수 없다. 우리가 요청받는 것은 기존의 틀을 넘어서는 변신적 변화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인간 의식 그 자체의 변신이다. 혼돈 속에서 새로운 의식의 길을 열어야만 우리는 이 아포리아(Aporia)를 넘어설 수 있다”고 강조했다. 아포리아는 고대 그리스어로 막다른 길, 해답 없음을 뜻한다.
경희는 이미 아포리아를 넘어선 경험이 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희학원 설립자는 ‘문화세계의 창조’를 경희의 정신으로 선언했다. 그 선언에는 전일적 사유와 전승화(全乘和) 철학이 깔려 있었다. 전승화 철학의 핵심은 ‘모든 것은 연결돼 있다’, ‘어떤 것도 고립되어 홀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유 체계다. 신 부원장은 “오늘의 인류가 던지는 질문도 바로 여기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하나의 생명적 사건, 그 얽힘 속에 있다. 타자에 대한 돌봄이 사라진 시대에는 희망이 존재할 수 없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는 분리된 시간이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얽혀 있다. 오늘 우리가 내리는 작은 선택 하나, 작은 실천 하나가 결국 우주의 질서를 흔들고 변화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맥락에서 전승화는 문명사적 의미를 부여받는다. 근대 문명은 인간과 자연, 주체와 객체, 동양과 서양을 분절해 왔다. 전승화는 이러한 분절적 사고를 넘어 통합적이고 전일적인 문명 패러다임을 제안한다. 이는 미래 문명을 재설계하기 위한 구체적인 사유의 토대다”라고 말했다.
두 번째로 김현 사무총장이 ‘전환 시대의 기관 경영’이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법인의 역할은 경희학원의 설립 정신을 바탕으로 학원의 역사와 전통을 계승·발전시키는 것이다. 대전환의 시대에 설립 정신이 갖는 의미를 파악하고 재해석하는 한편, 이를 학원 내부의 소통은 물론 대외 교류협력을 통해 국내외 사회와 공유하는 것도 법인의 역할이다. 법인은 산하 기관인 대학, 사이버대학, 의료기관, 병설학교 등 10개 기관의 경영을 대표하는 법적 책무도 지닌다. 이를 위해 법인 이사회는 산하 기관의 경영에 관한 중요사항을 심의해 결정한다.
이사회는 경희학원의 설립 정신, 전통과 함께 전환 시대가 요청하는 고등교육·학술 기관의 새로운 가치 구현을 포함해 △위상 △인사 △재정 △글로벌·공공 협력 △Space21 후속 사업 △거버넌스 △구성원 소통 △경희학원 이사회 협력과 관련해 도전 과제를 권고한 바 있다. 대학은 이에 기반해 경영 목표를 수립한 후, 법인과의 소통을 통해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결과 대학은 올해 THE(The Times Higher Education) 대학 영향력 평가 세계 19위·세계 사립대학 1위에 올랐다. 교육부의 대학혁신지원사업 성과평가에서 최고 등급(S등급)을 획득하는 성취도 거뒀다. 석학 초빙 제도인 ES·IS(Eminent Scholar·International Scholar)를 활용해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인 노보 셀로프 교수와 세계 석학인 하버드대 김필립 교수를 영입해 출범한 양자물질연구센터는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했다. 최근에는 대학기초연구소 지원 사업(G-LAMP 사업)의 천체·입자·우주과학 분야에 선정되면서 전환 시대를 선도하는 혁신적인 연구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이러한 성과에 대해 법인은 “대학의 교육 및 연구 전략 방향에 부합하는 부단한 노력의 결실이었다”고 평가하면서 “글로벌 난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더 큰 성과로 이어지길 기대한다”고 전했다.
행정 시스템 혁신·전일적으로 미래 예찰하면서 헤쳐 나가는 핵심 동력으로 AI 활용
경희학원은 대학 리더십이 추구하는 비약적인 도약, 퀀텀 리프(Quantum Leap)를 위한 디딤돌의 하나로 행정에 AI 기술을 적극 도입할 것을 제안했다. 문명사적 전환의 흐름 속에서 AI를 단순한 도구를 넘어서 행정 시스템을 혁신하고 미래를 전일적으로 예찰하면서 헤쳐 나가는 핵심 동력으로 활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에 법인은 이번 연찬회에서 AI 혁명과 활용에 관한 전문가 특강을 마련했다. 주영섭 국가과학기술연구회 융합연구위원장을 초청해 ‘대전환 시대의 패러다임 혁명과 AI/AX(Artificial Intelligence Transformation; 인공지능 전환) 전략적 방향’을 주제로 특강을 진행했다.
주 위원장은 “우리가 마주한 환경의 문제, 사회의 문제, 문명의 문제 모두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위협하는 방향으로 작동하고 있다”고 우려하면서 “그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AI를 활용해야 한다. AI 대전환을 통해 인류의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자는 것이 전 세계를 관통하는 패러다임”이라고 말했다. 이어 “기술 혁신도 기술 자체가 아니라 목적 중심으로 이뤄지고 있다. 관점이나 시대정신이 바뀌고 있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미션과 업을 재정의하면서 혁신하고 있다. 한 예로 윈도우, 소프트웨어 자체에만 집중하던 마이크로소프트는 2014년을 기점으로 혁신했다. 새로운 CEO로 임명된 사티아 나델라(현재는 MS 이사회 의장)는 ‘가치 중심’으로 미션을 새로 수립하고, 직원들의 마인드셋 자체를 바꿔 취임 10년 만에 마이크로소프트를 세계에서 가장 가치 있는 기업이자 AI 분야의 선두주자로 이끌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AI 도입과 이를 활용해 조직 전체를 혁신하는 AX는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요구라고 강조하면서 “AI를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으로 활용해야 한다. 대학도 AI를 활용해 역할과 기능을 대폭 향상할 수 있다. 인류의 지속 가능성이 위협받는 지금은 기업, 학교, 공공기관 등 모든 기관이 나서서 지적·물리적 역량 등 가능한 모든 역량을 AI를 통해 확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때 중요한 점은 ‘AI를 쓰는 목적은 무엇인가’를 고민하는 것이라고 밝힌 주 위원장은 “이 부분은 인간과 세상, 세계를 잘 알고 이해하는 사람들이 해야 한다. 따라서 대학이 중심이 돼야 한다. AI를 써서 무엇을 달성하려고 하는지를 바탕으로 컨센서스(Consensus)를 만들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새로운 성장 동력이 나올 수 있다. 대학이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그리고 대학의 AX는 이제 시작점에 있다. 모든 대학이 같은 출발선에 있다. 지금이 경희대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 ‘세계적인 대학’으로 도약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한다”는 말로 특강을 마쳤다.
글 오은경 oek8524@khu.ac.kr
사진 이춘한 choons@khu.ac.kr
ⓒ 경희대학교 커뮤니케이션센터 communication@kh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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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연구 총서 5 계몽주의와 근대문명의 재조명 THE REORIENTATION OF MODERN CIVILIZATION AND THE ENLIGHTENMENT 이한구・김현구・정용덕 편 152*225 | 284쪽 | 무선 22,000원 | 2025년 10월 30일 ISBN 978-89-8222-813-1 (94300) ISBN 978-89-8222-662-5 (set) 합리성을 위협하는 디지털 시대의 탈진실 현상 계몽주의의 현대적 재해석은 가능한가? 21세기 문제의식과 계몽주의 정신을 연결하는 ‘문명연구 총서’ 제5권! 유튜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짜 뉴스와 정보들은 AI 기술과 결합해 이제 진실과 거짓을 판별하기 힘든 수준으로 진화하고 있다. AGI(범용인공지능)의 탄생을 코앞에 두고 과거 ‘무지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시대를 말한 칸트의 경고가 현실로 도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근대문명의 기초를 놓은 계몽주의의 핵심은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과 정보화 사회는 인간 이성과 지식 확장을 넘어서, 현재는 오히려 정보의 홍수 속에서 진실을 왜곡하고 인간성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를 초래하고 있다. 오늘날 이성과 진보에 대한 믿음 모두가 불확실성과 위험에 처해 있기에, 계몽주의의 사상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재조명하기에 적합한 시점이기도 하다. 디지털 시대의 ‘탈-진실(post-truth)’은 계몽주의의 합리성과 진리 추구의 가치를 위협하며, 반대로 그 중요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명연구 총서 5 《계몽주의와 근대문명의 재조명》은 여전히 ‘진행 중인 과제’인 계몽주의를 현대적 맥락 속에서 재해석하고, 그것이 배제한 것들을 포용하는 방향으로 확장하려는 시도이다. 계몽주의를 재조명하는 일은 단순한 회고가 아니라 과거의 유산에 대한 점검이며, 미래 문명을 위한 출발점이다.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믿고, 어떤 가치를 기준으로 사회를 설계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다시 묻고, 다시 설계해야 한다. 여기 실린 9편의 글을 통해서 계몽주의와 관련하여 되돌아보아야 할 문제들과 현대에 비판적으로 계승해야 할 가치의 기준을 정립할 수 있을 것이다. 계몽주의 정신의 핵심과 비판적 계승을 다룬 9편의 글 제1부 계몽주의의 이념적 정초 ∎〈계몽주의와 열린사회의 이념적 기초〉 (이한구) 열린사회의 뿌리가 계몽주의에 있으며, 계몽적 기획의 발전 형태임을 비판적 이성, 자유주의, 인권이라는 세 가지 연결고리를 통해 논증한다. 또한 계몽주의의 부정적인 측면을 비판적 이성과 도구적 이성의 균형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다.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사익〉 (신중섭) 스코틀랜드 계몽주의는 사익을 단순한 이기심이 아닌 인간 내면의 공감 능력과 도덕 감정을 기반으로 한 질서를 토대로 해석했다. 이는 복합적 자유주의 모델로, 오늘날의 정치철학과 경제윤리 논의에 중요한 통찰을 제공한다. ∎〈계몽과 근대국가 형성〉 (정용덕) 계몽주의가 근대국가 형성에 미친 사상적・제도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고찰한다. 근대국가 형성의 특성을 영토 전역에 대한 합법적 폭력의 독점과 대외적 주권 확립, 행정의 관료제화, 국민 통합 이데올로기화로 일반화하며 이 모든 요소가 계몽주의 이념과 긴밀함을 설명한다. ∎〈계몽주의의 갱신을 위한 선결과제 고찰〉 (강학순) 계몽주의의 현대적 갱신 가능성을 분석하고 ‘계몽 2.0’ 개념을 제시한다. 이 개념의 필수 실천 과제로 생태적 감수성, 감정과 정서의 중요성, 제국주의적 잔재 성찰, 세계 시민성 등을 제시한다. 제2부 계몽주의의 비판적 계승 ∎〈탈진실 시대와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 (정제기) 21세기 정보화 시대에 나타난 ‘탈진실(post-truth)’ 현상과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의 의미를 탐구한다. 칸트의 ‘스스로 생각하라’는 명제는 가짜 뉴스, 확증편향, 군중심리 조장 등으로 점철된 현대 정보 환경에서 여전히 유효하다. ∎〈계몽사상의 서구보편주의를 넘어서〉 (김현구) 18세기 유럽 계몽주의로 유발된 서구 중심의 보편주의를 비판적으로 성찰한다. 우리는 근대 초입 일제의 식민 지배로 지적 전통이 단절・왜곡된 상태에서 서구의 근대 학문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계몽주의가 배타적 ‘지배 논리’로 기능해서는 안 되며 ‘다원적 보편주의’로 나아가야 함을 논한다. ∎〈칼 포퍼의 역사주의 비판〉 (이한구) 칼 포퍼의 관점에서 역사주의를 역사개성주의와 역사법칙주의로 분류하고, 그 문제점을 분석한다. 결정론이나 전체주의를 거부하고 역사적 닫힌 체계를 ‘역사적 열린 체계’로, 역사법칙을 ‘합리성의 원리’로 대체해야 함을 주장한다. ∎〈존 롤즈의 자유주의적 관용론〉 (박정순) 존 롤즈의 자유주의 철학에서 핵심적인 ‘관용’ 개념을 분석하며 이 개념이 실제 다원주의 사회에서 발생하는 갈등을 조정하고 민주적 공존을 가능케 하는 실천적 이론임을 강조한다. ∎〈하버마스의 소통 이성과 비판적 계몽〉 (윤평중) 현대사회에서 비판적 계몽의 가능성을 하버마스의 소통 이성과 공론장 이론에서 찾는다. 저자는 이 이론이 전통 계몽주의의 한계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며 21세기에 적합한 새로운 계몽 모델을 제시한다고 평가하고 있다. 차례 발간사 서문 제1부 계몽주의의 이념적 정초 계몽주의와 열린사회의 이념적 기초/ 이한구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사익-애덤 스미스를 중심으로/ 신중섭 계몽과 근대국가 형성-일반적 특성을 중심으로/ 정용덕 계몽주의 갱신을 위한 선결과제 고찰/ 강학순 제2부 계몽주의의 비판적 계승 탈진실 시대와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 정제기 계몽사상의 서구보편주의를 넘어서-한국 사회과학의 한국화 논리/ 김현구 칼 포퍼의 역사주의 비판/ 이한구 존 롤즈의 자유주의적 관용론/ 박정순 하버마스의 소통 이성과 비판적 계몽/ 윤평중 참고문헌 저자 · 이한구 경희대학교 석좌교수, 인류사회재건연구원장,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저서로 《역사주의와 반역사주의》 《지식의 성장》 《역사학의 철학》 《역사와 철학의 만남》 《문명의 융합》 등이 있다. · 신중섭 강원대학교 윤리교육학과 명예교수, 한국과학철학회 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위원을 역임. 저서로 《자유주의의 철학적 기초》 《마이클 샌델의 정의론 바로읽기》 《현대 문명의 전환》(공저) 등이 있다. · 정용덕 금강대학교 총장, 서울대학교 행정대학원 명예교수. 저서로 《공공갈등과 정책조정 리더십》 《거버넌스 제도의 합리적 선택》 《현대 국가의 행정학》 《신제도주의 연구》 등이 있다. · 강학순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특임연구원, 안양대학교 명예교수. 한국 하이데거학회 및 한국기독교철학회 회장 역임. 저서로 《존재와 공간》 《하이데거의 숙고적 사유-계산적 사고를 넘어서》 《시간의 지평에서 존재를 논하다》 등이 있다. · 정제기 영남대학교 객원 교수, 인문학&신학연구소 에라스무스 연구원. 주요 연구로 〈칸트 종교철학에서 근본악과 최고선의 문제〉(2024), 〈탈진실 시대의 비판철학의 요청〉(2024), 역서로 《바울과 철학의 거장들》 등이 있다. · 김현구 성균관대학교 행정학과・국정전문대학원 명예교수, 한국행정학회 회장 역임. 저서로 《한국 행정학의 한국화론》 등이 있다. · 박정순 연세대학교 미래캠퍼스 인문예술대학 철학과 교수(정년퇴임),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연구원 특별연구원, 한국윤리학회 회장 역임, 한국철학회 세계 석학 초빙강좌 〈다산기념철학강좌〉 운영위원장 역임. 저서로 《정의론과 정치철학》 《윤리적 삶과 사회적 규범의 성찰》 《존 롤즈의 정의론: 전개와 변천》 등이 있다. · 윤평중 한신대학교 철학과 교수, 한신대학교 대학원장 및 학술원장 역임. 저서로 《푸코와 하버마스를 넘어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과 포스트마르크스주의》 《담론이론의 사회철학》 《논쟁과 담론》 등이 있다. 미래문명원(www.gafc.khu.ac.kr) 경희학원은 창학 이래 보다 나은 인류사회 건설을 위한 다양한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특히 “문화세계의 창조”를 통해 ‘인류의 보편가치를 구현한다’는 취지 아래 사회운동과 평화운동에 주력하며 평화와 공영의 미래문명을 지향하는 전 지구적 사회운동을 전개해 왔습니다. 경희대학교 미래문명원은 이와 같은 경희학원의 학문과 평화의 전통을 이어받아 2005년 9월에 교책연구원으로 설립됐습니다. 새천년을 맞이하며 인간과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기획을 통해 인간중심의 지구협력사회, 미래지향의 지구공동사회를 이룩하자는 것이 그 설립 취지입니다. 현대사회, 현대 문명이 남겨놓은 현대적 아포리아를 넘어 자유와 평등, 평화와 공영의 인류 보편가치가 함께 살아 숨쉬는 체계적인 연구, 교육, 실천 사업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인류사회재건연구원(kihs.khu.ac.kr) 인류사회재건연구원경희대학교 교책연구원으로 1976년 3월에 설립되었습니다. 핵전쟁, 기후위기, 문명충돌, 인간성 상실 등 여러 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 문명의 시대적 조류를 분석하고 이에 대한 대책을 연구하여 보다 나은 인류의 미래를 구상하고 건설하는 것이 설립 목적입니다. 현재는 미래문명원의 연구 전담 산하기관으로 종합학술지 《OUGHTOPIA》를 발간하면서, 〈인류문명의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탐구〉 세미나를 개최하고 있습니다. ‘OUGHTOPIA’는 ought(當爲)와 topia(場所)의 합성어로서 ‘당위적 요청사회’를 의미합니다. 경희대학교 설립자인 故 조영식 박사가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 당위적으로 요청되는 사회라는 뜻에서 ‘OUGHTOPIA’의 개념과 철학을 창안하였습니다. 문명연구 총서 “각 분야 전문가들이 바라본 인류 문명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 〈문명연구 총서〉는 산업혁명에 이은 정보통신 혁명으로 발생한 문명의 변화와 문제점, 그 해결을 위한 방책에 이르기까지 문명전환 시기 논의해야 할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모여 진행한 문명연구 세미나의 결과물로 인류 문명에 대한 면밀한 해석과 문제점 진단,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 현대 문명의 전환 (문명연구 총서 1) ·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새로운 모색 (문명연구 총서 2) · 과학기술 문명에 대한 성찰 (문명연구 총서 3) · 인공지능과 포스트휴먼 (문명연구 총서 4) · 계몽주의와 근대문명의 재조명 (문명연구 총서 5) · 한국문명론 (문명연구 총서 6)_근간 책 내용 서문_계몽주의가 강조한 개인의 자율성과 보편적 이성은 오늘날 다양성과 차이의 문제를 충분히 포용하지 못한 채 경직된 기준이 되기도 한다. 페미니즘, 탈식민주의, 생태철학 등은 기존 계몽 담론의 한계와 배제의 문제를 비판하며 새로운 방향의 사유를 요구하고 있다. 그럼에도 계몽주의 정신, 즉 질문하고 성찰하며 권위를 비판하는 태도는 여전히 현대사회가 지향해야 할 핵심 가치로 남아 있다._[12쪽] 계몽주의와 열린사회의 이념적 기초_나는 계몽주의를 이성, 과학, 자유주의, 자연권, 진보의 핵심어들을 통해 설명했고, 열린사회 역시 존재론과 인식론, 사회윤리론을 통해 그 정체성을 부각시키려고 했다. 이제 이들이 서로 연관된다는 것, 더욱 정확히는 열린사회의 이념이 계몽주의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논증하는 일이 나의 과제이다. 나는 다음의 세 항목을 들어 이 문제에 답하려고 한다._[47쪽] 스코틀랜드 계몽주의와 사익_애덤 스미스의 조화라는 개념을 귀족과 지주, 그 나머지 사람들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개념으로도 이해할 수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본다면 애덤 스미스는 칼 마르크스 이후 사회철학의 중요한 의제가 된 빈부의 문제, 계급 대립의 문제는 관심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이 문제는 그가 살던 시대의 중요한 사회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문제 삼은 것은 모든 사람이 기본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경제적 토대의 확보였다._[80쪽] 계몽과 근대국가 형성_그렇기는 해도 현실에서 근대국가의 행동은 대개 “강제에 의해 뒷받침되는 관리된 동의의 형태”, 즉 강제와 동의가 혼재하는 상태에서 구현되고 있다는 것이 사회과학적 정설이다. 강제력을 행사하면서 동시에 그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는 모양새라고 할 수 있다. 이를 위해 국가는 강제력을 행사하기 위한 억압기구 외에 복지・교육 등의 사회 통합정책과 그것을 지원하기 위한 복지・교육기구 등을 제도화한다._[99쪽] 계몽주의의 갱신을 위한 선결과제 고찰_하버마스의 제자인 히스(J, Heath)도 제1계몽주의를 갱신하고, 현대에 맞게 업그레이드된 “계몽주의 2.0”이 필요함을 역설한다. 계몽주의 2.0은 현대사회에서 계몽주의 원칙을 새롭게 적용하고 발전시킨 개념을 가리킨다. …계몽주의 2.0은 이러한 원칙을 현대의 복잡한 사회 및 기술적 환경에 맞게 재해석하고 새로운 과제에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_[136쪽] 탈진실 시대와 칸트의 계몽주의 정신_사용자에게 뉴스를 제공하는 기준이 객관성이 아니라 선호도에 있다는 사실은 결국 사용자로 하여금 “반향실 효과”를 불러일으켜 확증편향을 강화시킬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그리고 이러한 반향실 효과는 종국에는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필터 버블” 상태를 야기하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현대사회에서 무분별한 가짜 뉴스가 대량으로 생성되는 원인을, 더 나아가 그 가짜 뉴스를 아무런 반성도 없이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되는 결정적인 원인을 함의한다._[152쪽] 계몽사상의 서구보편주의를 넘어서_서구 이론의 거센 파고 속에 우리의 학문적 정체성 확립을 위한 자구책이 토착화에 이어 한국화로 표출되었다. 서구 이론을 한국 현실에 맞게 적용하는 토착화가 소극적 자아준거화라면, 한국 현실을 토대로 독자적 이론을 형성하는 한국화는 적극적 자아준거화다. 한국화에는 가설적 맥락특화이론을 창출하는 ‘기본적 한국화’가 있는가 하면, 그 이론의 대외적 확산으로서 세계화를 지칭하는 ‘진정한 한국화’도 있다._[172쪽] 칼 포퍼의 역사주의 비판_이상의 논의를 종합해 보면, 역사개성주의와 역사법칙주의는 각각 다른 극단의 문제점을 드러낸다. 역사개성주의는 상대주의의 위험 속에서 보편성을 상실할 수 있으며, 반면 역사법칙주의는 법칙의 과도한 일반화로 인해 인간 사회의 복잡성과 자율성을 무시할 위험을 내포한다. 이제 이러한 이론적 입장들을 현대 인식론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고, 그 철학적 타당성을 면밀하게 검토하는 데 있다._[211쪽] 존 롤즈의 자유주의적 관용론_자유주의적 관용 정신의 확장 중 가장 중요한 것은 롤즈도 인정하고 있듯이 근대의 고색창연한 종교적 관용의 문제와 철학적・도덕적 교설들 사이의 추상적인 갈등이 아니라 보다 현대적 갈등인 “인종, 민족 그리고 성(race, ethnicity, and gender)”의 문제들을 다루는 것이 될 것이다. …억압과 갈등을 인정하고 치유하는 “차이의 정치(politics of difference)”를 보다 활성화시켜야만 진정한 관용의 정신을 구현할 수 있을 것이다._[242쪽] 하버마스의 소통 이성과 비판적 계몽_소통과 계몽을 가능케 하는 관용의 첫째 원칙으로 ‘나 또는 우리의 입장이 틀릴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가장 중요하다. 내가 오류를 범할 수도 있다는 걸 전제로 하고 대화하고 실천해야 한다. 내가 옳을 수도 있겠지만 마찬가지 논리로 틀릴 수도 있다. 또한 역으로 상대방이 틀릴 수도 있지만 옳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상대방의 입장에 대한 경청과 존중은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_[26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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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강희원 지음 | 152×225 | 280쪽 | 무선 | 19,000원 2025년 10월 10일 | ISBN 978-89-8222-810-0 (03300) 법철학자 강희원 교수의 신간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부제: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가 출간됐다. 이 책은 ‘nation’, ‘state’에 대한 언어학적 설명과 함께 고대의 영웅 숭배부터 중세의 성전(聖戰), 근대의 국가철학과 내셔널리즘을 거쳐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전쟁에서 목숨을 바치라는 ‘순국’을 합리화해 온 담론을 추적한다. 저자는 특히 우리나라에서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순국의 의무가 강제된 역사적 · 철학적 맥락을 탐색하며 우리가 당연시하던 민족과 국가라는 가치들에 의문을 제기한다. 이를 통해 민족은 만들어진 신화이고, 평화를 위한 전쟁은 거짓말에 불과하며, 국가가 강요하는 죽음은 신성한 제의가 아니라 강제된 폭력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는 걸 분명히 한다. 저자는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용기임을 강조한다.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는 법철학과 정치철학, 사회이론에 관심 있는 인문 교양 독자를 비롯해 평화와 인권에 관심 있는 독자, 전쟁 없는 세상을 꿈꾸고 삶의 평화를 설계하는 모든 이들을 위한 필독서이다. #국가 #민족 #전쟁 #순국 #평화 #비폭력 #반전(反戰) #민족주의비판 출판사 리뷰 어떻게 하면 평화로운 세상이 이루어질 수 있는가?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순국’을 비판적으로 고찰한 국내 최초의 책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용기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군사적 충돌이 벌어지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전쟁은 곧 끝날 것 같지만, 그렇다고 두 국가 사이에 일촉즉발의 상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이런 전쟁은 먼 이야기가 아니다.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우리나라는 남과 북이 반세기 넘게 극한의 대치를 이어가고 있다. 병역의무가 있는 이 땅에서는 젊은이들에게 어떻게 하면 적을 많이 죽일 수 있는지 연구하고 훈련하게 한다. 전쟁이 아니더라도 많은 이들이 군대 내 사고로 목숨을 잃는다. 우리나라는 대량살상무기를 생산하고 수출하기까지 한다.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은 왜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자신과 국가를 방어하기 위하여 적군의 생명을 파괴하는 일을 평화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정당화할 수 있을까?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에게 군대를 거부하고 국가를 위하여 죽지 않을 자유가 있는가? 순국자들을 추모하고 영웅시하는 일은 국가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의 집단적 질병인가? 국가권력자의 놀이인가? 평화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인가? 반인간적 욕구인가? 인간사회에서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에 신기루와 같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기망(欺妄)의 현상인가? (22쪽) 《왜 국가를 위해 죽어야 하나》는 이런 의문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역사에서 전쟁을 멈춘 적은 없다. 그래서 전쟁이 인간의 본성인 것처럼 여겨지기까지 한다. 그러나 철저한 평화주의자인 저자는 전쟁은 인간의 의무도 운명도 아니라는 걸 증명해 내고자 한다. 이를 위해 민족, 국가, 전쟁, 순국 등 우리가 당연시하던 언어와 가치들을 의문을 제기하고 그 개념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깊이 탐구한다. 저자는 국가와 민족의 이름으로 찬양하는 죽음은 강제된 국가 폭력의 이데올로기이고,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절대악인 전쟁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순국’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변화시킨 크리스트교 프랑크의 왕이 전개하는 전쟁을 회피하는 자들은 공동체로서 교회 전체, 가톨릭교의 교의(敎義), 성성(聖性)과 정의(正義), 그리고 성지로서의 왕국을 적대하는 자들이라고 천명되었다. 여기에서 어용 신학자인 크리스트교 교부들은 “프랑크 왕국을 위한 전쟁”이 바로 “성지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선언하면서, 프랑크의 왕과 왕국을 위해서 죽는 것, 즉 순국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켰다. (68-69쪽) 저자에 따르면 순국과 순국 찬양의 역사는 기원전부터 있었으나, 그 의미와 성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킨 것은 중세 유럽인들이 믿었던 크리스트교이다. “중세에 지상의 조국 개념은 크리스트교에 의해 천상의 조국 개념으로 대체되었고, 순국의 성격도 정치적 행위가 아닌 종교적 행위로 이해되었다.” 크리스트교도들은 ‘진정한 조국’인 천상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성인’이라 부르며 추앙했고,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까지 성지 팔레스티나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자 감행한 십자군 전쟁이 처음의 의도와 달리 국왕과 조국을 방어하기 위한 명분으로 퇴색했지만, 전쟁에 참가한 “십자군 전사는 자신의 모든 죄가 사면되고, 천국으로 직행한다고 확신했다.” 크리스트교는 십자군 전쟁을 성지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으로 승화시키고 이데올로기화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희생시켰다. 대량살상과 파괴를 정당화한 이데올로기, 내셔널리즘 근대 이후 거대한 파괴와 대량살상은 내셔널리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저자는 “내셔널리즘은 국가권력이 살육과 파괴라는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였다고 말한다. 그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범죄행위를 늘 정의(justice)로 포장해 왔다. 저자에 따르면 지배권력은 지방적 · 토착적 문화를 정복하거나 변형해서 획일적인 ‘국민문화’를 만들어 냈다. 내셔널리즘은 자기가 속한 네이션을 타자로부터 구별해서 의식하게 하고, 동지와 적을 나누어, ‘우리’라는 공동체 혹은 같은 영역에 속한 사람들 사이에 동질감을 느끼게 만들었다. 이를 통해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기희생까지 불사하는 애정을 환기시켰고, 이는 권력자를 위한 이데올로기로 작동했다. 저자는 우리에게 그토록 애정을 가지라고 주입하는 민족이란 지배자들에 의해 주입된 민족주의라는 환상을 통해서 생겨난다고 강조한다. 부르주아지가 장악한 근대 국가는 침략과 약탈을 통해 축적된 부를 ‘자본’으로 회전시켜, 자본을 무한히 확대 재생산하기 위해 ‘군대’를 동원했다. 자본이 더 많은 자기증식을 위해 자원과 시장을 찾는 과정에서 근대 국가는 다양한 방식의 ‘전쟁’을 수행하게 되었고, 고도로 발전한 ‘자본’의 매개 작용에 따라 국가와 국가 간의 무한경쟁에 따른 파시즘적 총력전을 수행하기도 했다. 네이션 스테이트의 응집력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개인은 자기 생명보다 국가의 유지를 중시하고, 손에는 총을 들고, 중무장한 탱크를 몰며, 총알과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으로 돌진해서 적국으로 지정된 다른 네이션 스테이트의 영토를 침공해 들어가 일말의 가책도 없이 그 터전을 파괴한다. 또한 그 구성원인 군인과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학살하고,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감내한다. 여기에서 ‘왜 인간은 그렇게까지 국가를 중시하는 것일까? 아니, 왜 인간이 그러한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제기된다. (192쪽) 이 책에서는 전쟁을 미화하고 찬양한 사상가들, 예컨대 휴고 그로티우스,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프리드리히 헤겔, 막스 셸러, 카를 슈미트 등의 전쟁 형이상학자들의 논리를 비판하기도 한다. 저자는 ‘전쟁을 통해 진보와 발전을 이룬다’, ‘전쟁의 과정을 거치면서 활력이 생겨난다’, ‘전쟁 이후에 평화와 인류의 가치가 정착된다’는 등 전쟁을 정당화하는 다양한 견해들이 있지만, 이것이 전쟁 중에 죽은 자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전쟁은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고 국가를 지지하게 만드는 정치의 방식이다. 내셔널리즘은 국가의 지배권력자가 자기들은 아무런 희생도 치르지 않으면서 계속 민중에게 죽음을 강요하고, 민중을 지배하고 선동하기 위해 만들어 낸 정치적·사회적·심리적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저자는 우리가 애착을 갖고 있는 ‘민족공동체’란 상상이며, “역사적‧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담론이 가진 허구성에 대해서 냉정하고 엄중한 분석과 성찰이” 요구된다고 강조한다. 애국주의 현상과 순국에 관해 정신분석학적으로도 접근하는 저자는 “애국주의는 평소에 국가권력이 주도면밀하게 주입하는 온갖 상징조작에 의해서 개인들이 걸려 있는 집단적 최면현상”이며 “순국이란 애국주의의 극단적 현상”이라고 분석한다. “전쟁은 인간의 의무도 운명도 아니다.” 저자는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인류사에서 있었던 적이 없다.”고 말한다. “전쟁은 최대 최고의 악(惡)”일 뿐이다. 저자는 “국민의 피와 땀을 파괴하는 최악의 범죄”인 전쟁을 일으키는 주체가 바로 국가라고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국가는 국민에게 전쟁터에 나가 파괴와 살상을 행하라고 명령하는 존재이며, 자신의 목숨을 바치라고 강요하는 “잠재적 살상단체”이다. “군대는 그러한 국가의 잠재적인 살인 장치”일 뿐이다. 저자는 평화를 목적으로 한다고 해도 전쟁은 “범죄행위에 불과하다”고 일갈하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고, 평화라는 목적은 평화적 수단에 의해서만 정당화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또 꼭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인류사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다. 피(blood)로는 피를 씻을 수 없다. 비폭력이 모든 정치적 · 도덕적 문제들의 해답이다. 전쟁이란 국가권력자들이 민족의 통일, 정의의 구현 또는 영토의 방위 등등 그럴싸한 미명하에 자행하는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전쟁은 정치(正治)로서 정치(政治)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자가 자신의 영락을 위해서 국민의 피와 땀을 파괴하는 최악의 범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평화를 위해 단호히 전쟁 수행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260쪽) 저자는 국가를 위해 죽으라고 강요하고 강제하는 것은 살인의 교사이자 살인행위 자체라고 정의한다. 그리고 전쟁이라는 절대악을 강요하는 국가권력을 위해 죽기를 거부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한다”고, “누구나 “아니오!”라고 자유롭게 말해야 하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자고 호소한다. “전쟁은 인간의 의무도 운명도 아니다.” 평화를 향한 진정한 용기란 전장으로 나가 살육과 파괴를 서슴지 않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전쟁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전쟁이 아니라 비폭력을 선택할 용기이다. 차례 프롤로그 이 글을 쓰게 된 이유 9 1장 인간과 국가 그리고 전쟁 19 1.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21 2. 민족통일이란 구호에 대해 25 2장 근본적인 물음 31 1. 왜 국가를 위해서 죽어야 하나 33 2. 국가와 민족을 위해 죽지 않을 자유 38 3장 순국 찬양의 기원 45 1. 순국 찬양의 관습 47 2.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 순국의 의미 49 조국(patria)이라는 말 | 고대 그리스 · 로마 시대 순국자의 신격화 3. 유럽 중세시대의 전사(戰死) 54 4. 크리스트교에 의한 순국의 종교적 이데올로기화 59 4장 민족과 국가 그리고 민족국가 71 1. 언어가 만든 세계 73 헌법 언어로서 국가와 국민, 민족 | 번역어로서 민족, 국가, 민족국가 2. 국가 신화와 정치신학 89 신비체의 의미 | 국가의 이상화: 신비체로서 국가 3. 민족이라는 신화 106 민족, 상상의 공동체 | 지배권력의 부산물로서 민족 관념 4. 근대민족국가 118 근대국가의 기초로서 사회계약 | 근대국가로서 네이션 스테이트의 실체 5장 전쟁과 병역의무, 죽음과 파괴의 언설 143 1. 전쟁이란 무엇인가 145 2. 전쟁의 형이상학: 전쟁 찬양론자의 변명 151 정당한 전쟁론: 휴고 그로티우스 | 국가 주권의 절대성의 징표로서 전쟁: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 | 인륜의 보약으로서 전쟁: 게오르크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 | 민족의식의 각성제로서 전쟁: 막스 셸러 | 정치로서 전쟁: 카를 슈미트 3. 전쟁의무로서 병역의무의 형이상학 172 4. ‘평화를 위한 전쟁’이라는 거짓말 177 6장 국민에게 죽음을 강요하는 국가 189 1. 전쟁의 시대 191 2. 죽음의 이데올로기로서 ‘내셔널리즘’ 193 주입된 이데올로기로서 내셔널리즘: 기호와 상징을 조작하는 ‘국가(권력)’ | 내셔널리즘의 주박(呪縛) 3. 국가라는 이름의 전범 210 폭력 조직으로서 국가 | 최악의 범죄자로서 국가권력, 최대 최고 악(惡)으로서 전쟁 4. 호모 사케르로서 국민: 전쟁과 국가 그리고 개인 217 전쟁의 예외상태론: 주권 절대성의 징표로서 전쟁 | 제물(祭物)로서 국민 | 강제수용소로서 국가 5. 순국자의 정신분석 242 리비도적 동일화의 욕구로서 애국 | 리비도적 동일화의 극단으로서 순국 에필로그: 전쟁 없는 세상을 위해 어떻게 저항할 것인가 260 저자 후기 270 참고 문헌 275 지은이 강희원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을 졸업하고 동 대학원을 수료한 뒤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변호사로 활동하였다. 이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및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 30여 년간 재직하며 법철학, 법사회학, 민사소송법, 노동법, 법조윤리를 강의하였다. 현재는 경희대학교 명예교수로 있다. 저자는 법의 문제를 인간, 국가, 사회, 종교, 정치, 언어 등과의 관계 속에서 탐구해 왔다. ‘법과 인간(법-인간)’, ‘법과 정치(법-정치)’, ‘법과 사회(법-사회)’, ‘법과 종교(법-종교)’, ‘법과 언어(법-언어)’와 같이 접속조사나 하이픈을 통해 법을 다양한 인문·사회적 맥락과 연결하는 ‘사이학(間學, betweenscience, Zwischenswissenschaft)’ 또는 ‘사회철학(間哲學, betweenphilosophy, Zwischensphilosophie)’을 추구해 왔다. 『노동법의 새로운 모색』, 『노동법 기초이론』, 『법철학 강의』 등의 저서를 집필했으며, R. C. 크반트의 『노동철학』과 니클라스 루만의 『법사회학』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또한 「한국의 법문화와 샤머니즘」, 「독일적 법사유와 한국법학의 반성」, 「역할법으로서 노동법」, 「태초의 노동계약 — 성경의 노동약정」, 「법과 폭력」, 「법의 녹색화와 녹색법학」, 「법에 대한 기호학적 접근」 등 120여 편의 논문을 발표하였다. 책 속으로 ‘민족(民族, nation)’은 우리 실정헌법의 언어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헌법학이나 공법학의 논의 주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현재까지 민족은 거의 논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이는 법의 뿌리에까지 접근하는 법철학에서조차 마찬가지였다. -15쪽 이 책에서는 전시(戰時)에 인간으로서 국민이 ‘조국을 위해서 죽는다는 것(Pro Patria Mori)’, 즉 ‘순국’이 어떻게 강제되었고 또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나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역사적 · 철학적 측면에서 깊게 성찰해 보고자 한다. -16쪽 전쟁은 인간의 본성인가? 인간의 집단적 질병인가? 국가권력자의 놀이인가? 평화는 인간의 본성에 반하는 것인가? 반인간적 욕구인가? 인간사회에서 평화란 전쟁과 전쟁 사이에 신기루와 같이 잠시 나타났다가 사라져 버리는 기망(欺妄)의 현상인가? -22쪽 우리는 여기에서 근원적인 질문에 봉착한다. 왜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 죽어야 하는가? 도대체 ‘국가’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인가? ‘민족’은 반드시 ‘국가’를 가져야 하는가? ‘민족’과 ‘국가’ 없이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길은 없는가? -35쪽 한반도의 남쪽과 북쪽에 사는 사람들에게 ‘한(韓)’이라는 ‘민족’은 지배권력이 만들어 낸 역사적 · 문화적 구성물이 아니라, 마치 신화 속에만 존재하던 군주인 단군이 실제로 자식을 낳아 그 후손이 퍼져 형성된 ‘원초적인 혈연공동체’인 것처럼 각인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상상 속의 ‘민족공동체’라는 관념에, 그것이 마치 본능의 일부인 것처럼 애착을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러나 이제 역사적 · 문화적 구성물로서의 ‘민족’과 민족주의 담론이 가진 허구성에 대해서 냉정하고 엄중한 분석과 성찰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있다. 그러한 언설(言說)과 담론 혹은 신념은 누구를 위해서, 누구에 의해서 조작되었는가? 그것은 지배집단에 의해 주입된 정치적 · 문화적 마약(narcotics)이 아닌가? -42쪽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시민이 공동체를 위해서 전사하면 그 사자(死者)를 신격화했지만, 시민이 ‘조국을 위해서’ 죽는 것 자체는 시민계급의 자기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 약간 중립적으로 말한다면, 누구라도 자신의 조국을 위해서 죽을 수 있도록 종교적 방향(芳香)과 의미에서 전사(戰死) 자체를 본격적으로 신성(神聖)으로 승화시켰던 것은 아닌 것 같다. 물론 그 후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시민적 사고(思考)가 여러 면에서 중세 유럽 사상의 형성에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은 사실이다. -54쪽 중세 유럽 사람들이 품고 있던 순국(殉國)의 의미와 성격을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던 것은 크리스트교였다. -59쪽 프랑크의 왕이 전개하는 전쟁을 회피하는 자들은 공동체로서 교회 전체, 가톨릭교의 교의(敎義), 성성(聖性)과 정의(正義), 그리고 성지로서의 왕국을 적대하는 자들이라고 천명되었다. 여기에서 어용 신학자인 크리스트교 교부들은 “프랑크 왕국을 위한 전쟁”이 바로 “성지수호를 위한 성스러운 전쟁”이라고 선언하면서, 프랑크의 왕과 왕국을 위해서 죽는 것, 즉 순국을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승화시켰다. -68-69쪽 근대 이후 거대한 파괴와 대량의 살육이라는 무서운 악(惡)의 소굴이 내셔널리즘이다. 내셔널리즘은 국가권력이 살육과 파괴라는 악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 낸 이데올로기다. 그 이데올로기는 국가권력의 범죄행위를 늘 정의(justice)로 포장한다. -72쪽 근대 이후 서유럽에서 국가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전쟁과 살육의 역사를 보면, 국가란 인간들의 사회적 본능의 일부로서 투쟁의 본능에 입각한 제도가 아닌가 싶다. 이런 의미에서 인간의 사회성이란 국가 권력이 내세우는 이상이나 이념과는 완전히 몰(沒)교섭적으로 작용하고, 발전하여 완성되어 가는 성질의 것이다. 국가라는 제도는 그러한 투쟁본능을 강제적으로 조직하는 힘의 발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89쪽 중세 유럽에서는 ‘신비체(神祕體, Mysterium: a mysterious body)’가 피지배민, 즉 백성의 ‘도덕적 정치체’와 동일시되고, 그 후 국가와 동일화되었다. 그 결과 국가는 오늘날 법인격(法人格, legal person)이 인정되고 있는 주식회사 등 각종의 회사(會社) 등과 같은 법인(法人, corporate body)과 유사한 관념적인 신비체가 되고 그것을 위한 죽음은 신성한 고귀성(高貴性)을 가지게 되었다. 그 결과 조국을 위한 죽음은 이제 종교적인 관점에서 생각되기 시작했다. 즉 그것은 교회의 ‘신비체’와 같이 현실성을 가진 국가의 ‘신비체’를 위한 희생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는 바로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확실하게 존재했지만, 중세 초기에는 사실상 존재하지 않았던, 세속국가에 대한 윤리적 가치나 도덕적 감정의 회복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것은 ‘조국을 위해서 죽는다’라는 관념이 크리스트교로부터 이교화(異敎化) 및 이단화(異端化)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크리스트교적 차원으로 승화되었다는 의미다. -101-102쪽 역사적으로 보면, ‘네이션’의 문제는 결코 새롭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절실한 현실적인 문제로서 거론되고 있다.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민족문제’와 ‘민족운동’은 19세기 이래 20세기의 제국주의 시대를 관통해서 그 심각성을 더해갔다. ‘파시즘’으로 불리는 ‘극단적인 민족주의’의 경험도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다. 최근에 ‘민족’의 문제가 새로이 적극적인 의미로 제기되고 있는 것은 현 단계의 세계사에서 ‘평화’가 매우 중요한 화두가 되어온 수년간의 사정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106쪽 유럽에서 네이션 스테이트의 형성과정은 유럽 자본주의의 발달과정과 일치한다. 서유럽에서 시작된 내셔널리즘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그것에 기초한 서유럽의 네이션 스테이트 내부에서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제국주의로 전개되었다. 근대 자본주의를 바탕으로 한 국내 시장 형성의 요구는 네이션 스테이트의 토대가 되었다. 국내 자본주의 시장이 형성되려면 국가 구성원의 모든 계급을 신분적인 제한에서 해방하고, 자유롭고 평등한 형식이 필요했다. 과거의 신분세습을 타파하기 위해서 민주주의적 권리를 주장할 필요가 있었다. 그 때문에 봉건주의와 절대주의를 타파하기 위한 민주주의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네이션 스테이트는 이러한 혁명의 결과로 생긴다. -126쪽 전쟁은 우리의 마음을 쥐어짜고 기쁘게 하거나 슬프게 한다. 우리는 출정자를 격려해 전장으로 보내고, 전사자의 공을 기리며, 개선자를 기쁘게 맞이한다. 이는 전쟁이 단순한 자연적 사실을 넘어 사회적 · 정치적 의의를 지니고, 우리의 정신에 울림을 주는 사건임을 의미한다. 그러한 전쟁의 의의나 정신에 대해 과학은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는다. -150쪽 현재 인류는 사용하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우리말 ‘민족국가’ 또는 ‘국민국가’로 번역되는 ‘네이션 스테이트’의 시대에 살고 있다. 전 인류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인간들은 ‘네이션 스테이트’라는 테두리 안에서 상당한 물질적 번영을 이룩하고 있다. 그렇지만 다른 한편으로 네이션 스테이트들은 그 테두리 밖에서는 ‘전쟁기계’로서 서로 각축하고 있다. 이러한 의미에서 네이션 스테이트의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근현대, 특히 20세기 이후는 그야말로 대규모 전쟁의 시대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191쪽 네이션 스테이트의 응집력으로 오늘날에도 여전히 개개인은 자기 생명보다 국가의 유지를 중시하고, 손에는 총을 들고, 중무장한 탱크를 몰며, 총알과 포탄이 비 오듯이 쏟아지는 전장(戰場)으로 돌진해서 적국으로 지정된 다른 네이션 스테이트의 영토를 침공해 들어가 일말의 가책도 없이 그 터전을 파괴한다. 또한 그 구성원인 군인과 민간인들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학살하고, 자신들에게 닥쳐오는 고통을 감내한다. 여기에서 ‘왜 인간은 그렇게까지 국가를 중시하는 것일까? 아니, 왜 인간이 그러한 국가를 필요로 하는가?’ 등의 근본적인 물음들이 제기된다. -192쪽 전쟁이란 국가권력 집단 간 정치권력의 쟁탈전일 뿐이다. 그들은 최악의 범죄자들이다. 권력자들은 자신들이 보기 싫은 놈을 배제하고 더 큰 정치권력을 얻고 싶은 욕망에서, 더 많은 사람을 지배하기 위해서 전쟁을 시작한다. 정치권력을 손아귀에 넣기 위해 정치인들은 온갖 수단을 동원해 전쟁을 정당화하려 한다. 일단 전쟁이 시작되면, 분쟁국의 군인들은 상대국 국민을 죽이고, 이들 가족은 갈라져 서로 교류할 수 없게 된다. 그들과 교류하는 자는 반역 또는 반국가세력으로 낙인찍힌다. -216쪽 우리가 평화 속에서 살아가기 위해서 반드시 포기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또 꼭 성취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이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좋은 전쟁 또는 나쁜 평화란 인류사에서 지금까지 있었던 적이 없다. 피(blood)로는 피를 씻을 수 없다. 비폭력이 모든 정치적 · 도덕적 문제들의 해답이다. 전쟁이란 국가권력자들이 민족의 통일, 정의의 구현 또는 영토의 방위 등등 그럴싸한 미명하에 자행하는 범죄행위에 불과하다. 전쟁은 정치(正治)로서 정치(政治)가 아니다. 그것은 국가권력자가 자신의 영락을 위해서 국민의 피와 땀을 파괴하는 최악의 범죄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삶의 평화를 위해 단호히 전쟁 수행의 명령을 거부해야 한다. -2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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